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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에르제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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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16세기에서 17세기 헝가리의 귀족으로, 바토리 가문 출신이다. 1575년 너더슈디 페렌츠 2세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남편의 부재 시 영지를 관리했다. 1604년 남편 사후, 체이테 성에서 하녀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 결과 공범들은 처형되었고,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녀가 실제로 연쇄 살인범이었는지,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흡혈귀 전설의 모티브 중 하나로 여겨져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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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에르제베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엘리자베트 바토리
엘리자베트 바토리
다른 이름피의 백작부인
출생 이름Báthori Erzsébet (바토리 에르제베트)
출생일1560년 8월 7일
출생지니르바토르, 헝가리 왕국
사망일1614년 8월 21일
사망지체이테, 헝가리 왕국 (현재 차흐티체, 슬로바키아)
알려진 이유헝가리 귀족, 민속의 주제, 연쇄 살인 혐의
배우자너다슈디 2세 페렌츠
가족바토리 가문
친척폴란드 왕 스테판 바토리 (삼촌)
스테판 7세 바토리 (아버지의 할아버지)
스테판 8세 바토리 (어머니의 할아버지)
콘라트 붉은 공작, 마조비아와 바르샤바 공작 (아버지의 증조부)
안나 라지비우 (아버지의 증조모)
언드라시 바토리 (사촌)
가보르 바토리 (사촌)
헝가리어 이름
헝가리어Báthori Erzsébet (바토리 에르제베트)
헝가리어 발음 (IPA)ˈbaːtɔri ˈɛrʒeːbɛt
슬로바키아어 이름
슬로바키아어Alžbeta Bátoriová (알주베타 바토리오바)

2. 가계 및 배경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16세기와 17세기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바토리 가문 출신이다. 그녀의 가문은 폴란드의 왕 스테판 바토리를 배출하는 등 높은 명성을 누렸다. 에르제베트는 1575년 헝가리 왕국의 귀족 너더슈디 페렌츠 2세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자녀가 태어났다.[43][44] 당시 귀족 사회의 관습처럼 바토리 가문 내에서도 재산과 권력 유지를 위한 근친혼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에르제베트의 직계 가족에게도 해당되었다. 에르제베트 자신은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영지 관리를 맡는 등 교양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45]

2. 1. 가문

25세 때의 초상(1585년)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16세기부터 17세기 당시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 중 하나였던 바토리 가 출신이다. 이 가문은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와 비교될 정도로 유서 깊고 부유했으며, 에르제베트는 에체드의 바토리 죄르지(Ecsedi Báthory György)와 솜요의 바토리 언나(Somlyói Báthory Anna) 사이에서 태어났다.[40][41] 그녀는 폴란드 왕위에 올라 바토리 가문의 권세를 크게 높인 스테판 바토리의 조카였으며, 당시 트란실바니아 공과 헝가리 왕국재상 역시 그녀의 사촌이었다.

당시 유럽의 여러 귀족 가문처럼 바토리 가문 역시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반복했다. 이러한 혈족 결혼은 정신이상이나 기형과 같은 유전적 문제를 일으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에르제베트의 가까운 친척 중에는 악마 숭배자로 알려진 숙부나 색정광으로 소문난 형제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에르제베트의 부모 역시 혈족 관계였으며(외할머니 텔레그디 커털린과 아버지 죄르지가 사촌 지간), 에르제베트 본인도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심하고 다소 괴팍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이는 가문의 근친혼 관행과 무관하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일설에는 그녀가 14살 때 하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너더슈디 페렌츠 2세


에르제베트는 바르바라 알렉산드로브나, 바르샤바의 볼레스와프 4세, 미칼로유스 라드빌라 노바지의 증손녀였으며, 볼레스와프 야누쇼비치의 4대손, 블라디미르 올게르도비치의 5대손, 그리고 알기르다스의 6대손에 해당한다.

1575년, 15세의 에르제베트는 5살 연상의 헝가리 귀족 너더슈디 페렌츠 2세와 결혼했다. 페렌츠의 아버지 너더슈디 터머시는 페르디난트 1세 치하에서 헝가리 부왕을 지낸 인물이지만, 신분상으로는 바토리 가문이 더 높았기에 에르제베트는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을 유지했다. 남편 페렌츠는 긴 전쟁 (오스만 전쟁)에서 헝가리 군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나, 동시에 잔혹함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이 결혼 역시 혈족 결혼이었는데, 페렌츠는 에르제베트의 부계 고조부 에체디 바토리 이슈트반 3세의 여동생 커털린의 후손이었고, 에르제베트는 페렌츠의 모계 고조부 드라피 베르트란의 이복 여동생 율리아나의 증손녀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언드라시(András), 펄(Pál), 언나(Anna), 커털린(Katalin), 미클로시(Miklós), 올쇼랴(Orsolya) 등 6명의 자녀(3남 3녀)가 태어났다.[43][44] 장녀 언나는 니콜라 6세 즈린스키 백작과 결혼했고, 차녀 커털린은 호몬나이의 돌게트 죄르지와 결혼했다.

에르제베트는 라틴어, 그리스어 등 여러 언어를 읽고 쓸 줄 아는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전쟁 때문에 남편이 자주 집을 비우자, 그녀는 성과 수백 홀드[45]에 달하는 영지를 포함한 장원을 직접 관리했으며, 외국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2. 2. 출생 및 성장

에르제베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에체드 성


엘리자베스 바토리 초상화
자이(Zay) 화가가 그린 엘리자베스 바토리 초상화(추정)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1560년 왕립 헝가리의 니르바토르에 있는 가문 영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트란실바니아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와 견줄 만큼 유서 깊고 부유한 바토리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에체드(Ecsed) 분가의 바론 죄르지 6세 바토리(1570년 사망)이며, 어머니는 솜리요(Somlyó) 분가의 바론 부인 안나 바토리(1537–1570)이다.[34] 어머니를 통해 에르제베트는 훗날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는 트란실바니아 공작 스테판 바토리(1533–1586)의 조카이기도 하다.[34] 그녀의 오빠 스테판 바토리(1555–1605)는 헝가리의 왕립 재판관을 지냈다.[7]

당시 유럽 귀족 가문들은 재산과 영지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자주 했는데, 바토리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르제베트의 부모 역시 혈족 관계였으며, 가까운 친척 중에는 악마 숭배자로 소문난 숙부나 색정광으로 알려진 형제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근친혼의 영향으로 정신 질환이나 기형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고 추정된다.

에르제베트는 에체드 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칼뱅주의 개신교 신자로 자랐으며,[23] 라틴어, 독일어, 헝가리어, 그리스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3][13] 특권층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와 높은 수준의 교육, 그리고 뛰어난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34] 어린 시절부터 감정 기복이 심하고 괴팍한 성격을 지녔다는 기록도 있다.

어린 시절 간질로 추정되는 여러 차례의 발작을 겪었다고 한다.[13] 당시에는 이를 '낙상병'으로 진단했으며, 발작을 멈추게 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의 피를 환자의 입술에 바르거나, 발작 후 피와 두개골 조각을 섞어 먹이는 등의 민간요법이 사용되기도 했다.[14]

13세 또는 14세 경, 결혼 전에 농민 소년의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했다는 소문이 있다.[12] 이 이야기에 따르면, 아이는 가문이 신뢰하는 여성에게 맡겨져 왈라키아로 보내졌다고 한다.[12] 하지만 이 소문은 에르제베트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농민들 사이에서 퍼진 이야기이므로, 그 진위는 불확실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3. 결혼 생활

1575년, 15세의 에르제베트는 5살 연상의 헝가리 귀족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과 결혼했다. 에르제베트는 남편보다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유지했다. 남편 나더슈디 페렌츠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헝가리군을 지휘한 인물로, 용맹함과 동시에 잔혹함으로도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섯 명의 아이가 태어났으나, 전쟁으로 인해 남편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1602년 또는 1604년에 남편이 사망하면서 에르제베트는 과부가 되었고, 이후 자신의 영지인 슬로바키아 지방의 체이테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 1. 나더슈디 페렌츠와의 결혼

체이테(Čachtice) 박물관에 있는 나더슈디 페렌츠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초상화


1575년 5월 8일, 15세의 에르제베트는 5살 연상의 헝가리 귀족 나더슈디 페렌츠 2세와 바란노 궁전에서 결혼했다.[7] 이 결혼은 당시 귀족 사회의 정략결혼이었으며, 두 사람은 1573년에 약혼한 상태였다.[7] 에르제베트는 남편보다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유지했다.

나더슈디 페렌츠는 나다스디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페르디난트 1세 치세에 헝가리 부왕을 지낸 너더슈디 터머시이며 어머니는 오르솔랴 카니자이(1523–1571)였다.[7] 페렌츠는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특히 터키와의 긴 전쟁, 1593–1606)에서 헝가리군 최고 사령관(1578년부터)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으며, 용맹함과 동시에 잔혹함으로도 유명했다. 에르제베트와 페렌츠는 먼 친척 관계로, 당시 귀족 가문들처럼 혈족 결혼이었다.

결혼 후 부부는 사르바르에 있는 나더슈디 가문의 성에 거주했다.[7] 페렌츠는 결혼 선물로 체이테 성(Čachtice)과 주변 17개 마을을 에르제베트에게 주었다.[7] 이 성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 소유였으나, 페렌츠의 어머니 오르솔랴 카니자이가 관리인으로 있었고, 페렌츠가 160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로부터 매입했다.[15]

체이테 성의 항공 사진


페렌츠가 전쟁으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에르제베트는 라틴어, 그리스어 등에 능통한 교양을 바탕으로 사르바르와 체이테를 포함한 광대한 영지와 사업을 관리했다. 이 역할에는 헝가리인과 슬로바키아인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전쟁 중 의료 지원 제공, 비엔나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오스만 제국의 침략 위협이 컸던 영지를 방어하는 역할까지 포함했다. 그녀는 외국 유학을 가는 학생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6명의 자녀가 태어났다.[43][44]

이름생몰년비고
안나 (Anna)1585년 ~ ?니콜라 6세 즈린스키 백작과 결혼
오르솔랴 (Orsolya)1590년 ~ ?이슈트반 2세 베뇨 가문과 결혼
카탈린 (Katalin)1594년 ~ ?호몬나이의 죄르지 드루게트와 결혼
안드라스 (András)1596년 ~ 1603년요절
팔 (Pál)1598년 ~ 1650년프란츠 3세 나다스디의 아버지 (거물 음모 관련)
미클로시 (Miklós)? ~ ?일부 기록에 등장하나 불확실[43][44], 주스자나 즈린스키 가문과 결혼했다고도 함. 1610년 에르제베트의 유언장에는 언급되지 않음.



모든 자녀는 에르제베트 본인처럼 유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1604년 1월 4일, 나더슈디 페렌츠는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1601년부터 다리에 쇠약성 통증을 앓았고 1603년에는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바토리와 29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죽기 전, 페렌츠는 자신의 상속자들과 아내 에르제베트를 투르조 죄르지에게 맡겼다.

3. 2. 과부 생활과 체이테 성

1604년 남편 너더슈디 페렌츠 2세가 사망하자[43] 에르제베트는 남편으로부터 증여받아 자신의 소유가 된 체이테 성(현재 슬로바키아 영토)으로 거처를 옮겼다. 남편의 사망 원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601년부터 다리에 통증을 유발하는 질병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편 페렌츠는 죽기 전 자신의 상속자와 아내 에르제베트를 죄르지 투르조에게 위탁했는데, 투르조는 훗날 에르제베트의 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를 주도하게 된다.

체이테 성터


에르제베트의 하인들에 대한 잔혹 행위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지만, 남편 사후 체이테 성에서 더욱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영지 내 농노의 딸들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점차 하급 귀족의 딸들까지 "예절 교육"을 명목으로 유인하여 학대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어린 소녀들을 "철의 처녀"와 유사한 기구로 살해하고 그 피를 뒤집어쓰거나, 고문 도구로 손가락을 자르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겼으며, 칼날이 박힌 상자에 밀어 넣거나 하인들에게 소녀들의 살점을 찢도록 명령하고, 성기을 도려내는 등의 행위를 통해 흥분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18세기 러시아 제국의 귀족 다리야 살티코바의 사례와 비교되기도 한다.

지방의 루터교 목사가 이러한 행위에 대해 고발하면서 관리들도 사태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바토리 가문의 명성을 고려하여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피해가 귀족의 딸들에게까지 확산되면서 헝가리 왕국을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에도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610년, 성에 감금되어 있던 소녀 중 한 명이 탈출하면서 마침내 공식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성에 들어간 관리들은 잔혹 행위의 흔적이 남은 시신들과 쇠약해진 생존자들을 발견했으며, 성 곳곳에 많은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612년 12월 13일, 니콜라 6세 즈린스키는 에르제베트의 투옥과 재산 분배에 관한 투르조와의 합의를 확인했다.[17] 같은 해 12월 31일(새해 전날), 투르조는 예고 없이 체이테 성을 방문하여 에르제베트와 공범으로 지목된 하인 4명(도로티야 셈테스, 일로나 요, 카타리나 베니츠카, 야노스 우이바리)을 체포했다. 투르조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성 안에서 죽은 소녀 1명과 살아있는 소녀 1명을 발견했다고 하지만,[17]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물었다는 증거는 없다. 에르제베트가 고문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는 통념과 달리, 그녀는 저녁 식사 중에 체포되었다. 투르조는 처음에 손님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를 현행범으로 잡았다고 알렸으나, 실제로는 희생자를 발견하거나 제시하기 전에 체포 및 구금이 이루어졌다. 투르조가 피로 뒤덮인 에르제베트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각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20]

투르조는 에르제베트의 아들 파울과 두 사위 니콜라 6세 즈린스키, 죄르지 드루게트와 후속 조치를 논의했다.[17] 당시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하던 가브리엘 바토리를 포함한 바토리 가문은 이 사건으로 인해 막대한 재산이 왕실에 몰수될 것을 우려했다. 투르조는 처음에는 파울 및 사위들과 함께 에르제베트를 수녀원으로 보내려 했으나, 그녀의 행위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결국 엄격한 가택 연금에 처하기로 결정했다.[21]

에르제베트 체포 이후 두 차례의 재판이 열렸는데, 첫 재판은 1611년 1월 2일에, 두 번째 재판은 1월 7일에 진행되었다.[25] 이 재판은 주로 공범으로 지목된 하인들을 대상으로 했다. 재판에는 17명의 증인과 함께 용의자인 하인 4명이 출석했다. 이들 하인들은 재판 전에 고문을 받았으며, 에르제베트의 명령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22] 재판 결과, 일로나 요와 도로티야 센테스는 뜨겁게 달군 핀셋으로 손가락이 뽑힌 뒤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야노스 우이바리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참수된 후 시신이 불태워졌다. 처음에는 체포를 피했던 에르지 마요로바는 붙잡힌 후 산 채로 화형당했다. 카타리나 베니츠카는 다른 하인들에게 학대를 당했다는 증거가 참작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살인 혐의는 주로 소문에 근거했으며, 당시 기록상 에르제베트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사소한 피해(닭 도둑질 등)에 대해서도 불만 편지가 작성되던 관행과는 대조적이다.[23][24] 재판 과정에서 언급된 최대 희생자 수는 650명이었으나, 이는 수산나라는 하녀가 에르제베트의 측근인 야곱 실바시로부터 "백작 부인의 개인 책에서 그 숫자를 보았다"고 들었다는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책은 공개된 적이 없으며, 실바시 본인도 증언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26]

4. 범죄 혐의 및 재판

현지에 거주하던 루터교 목사 이슈트반 머저리(István Magyari)가 에르제베트의 기이한 행각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당국에 알렸으나[16], 바토리 가문의 명성을 고려하여 초기에는 제대로 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가 하급 귀족의 딸에게까지 미치자 헝가리 왕국(합스부르크 가문) 궁정에도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610년, 감금되었던 소녀 한 명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신고하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1610년 12월 30일, 투르조 죄르지 백작이 이끄는 조사팀이 체이테 성에 들어가 다수의 시체와 생존자, 고문 도구 등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6] 성 주변에서는 매장된 시신 50여 구가 추가로 발견되기도 했다.

조사에 따르면 에르제베트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수백 명의 소녀를 살해하고 그 피로 목욕했다고 알려졌으며[48], 그녀의 일기에는 1600년부터 1610년까지 612명을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48]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혐의가 과장되었거나 정치적 음모의 결과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스즐로 나기(László Nagy)와 이르마 사데츠키-카르도스(Irma Szádeczky-Kardoss) 등은 에르제베트가 정치적 음모의 희생자라고 주장한다.[23][32] 나기는 에르제베트에 대한 소송이 남편 사후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소유하게 된 그녀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 헝가리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개신교 확산,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력 강화 등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갈등 상황에 놓여 있었다.[33] 특히 신성 로마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이었던 마티아스는 에르제베트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그녀가 체포된 후 이 빚은 탕감되었다.[2]

이러한 음모론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최초 고발자가 루터교 목사였다는 점은 가톨릭/합스부르크 세력이 개신교도인 에르제베트를 음해했다는 주장과 다소 어긋난다. 다만 에르제베트는 루터교가 아닌 칼뱅주의자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 갈등이 동기가 되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34] 또한 투르조가 성에서 발견했다는 시체와 생존자들에 대한 기록[6] 역시 음모론을 반박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사데츠키-카르도스는 이러한 물리적 증거가 과장되었으며, 투르조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부상당하거나 병든 사람들을 에르제베트의 희생자로 조작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3]

4. 1. 잔혹 행위 의혹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남편 페렌츠 나더슈디가 집을 자주 비우는 동안, 에르제베트는 성별에 관계없이 많은 애인을 두고 사치를 부리며 자신의 미모를 유지하는 데 집착했다고 전해지지만, 부부 사이는 좋았다고도 한다. 1604년 남편이 사망하자 남편으로부터 증여받아 그녀 자신의 소유가 된 체이테 성(슬로바키아어: Čachtický hradsk, 현재는 슬로바키아 영토)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인에 대한 잔혹 행위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나, 남편과 사별한 후에 더욱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영내 농노의 딸을 유괴하여 살해했지만, 점차 하급 귀족의 딸에게까지 범행 대상을 넓혔다. 하급 귀족의 딸들은 "예절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유인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에르제베트는 젊은 처녀의 피로 목욕하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소녀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어느 날 간질 발작을 일으켰을 때 부축하려던 하녀의 팔을 물어뜯었는데, 하녀의 피를 보자 발작이 멈췄고 이후 피를 흘리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체이테 성에 들어간 여자들이 돌아오지 않고 성 정원에 묻힌다는 소문이 퍼졌다. 심지어 남편 나더슈디가 에르제베트의 잔혹한 취미를 알게 되어 살해당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러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성 주변의 가난한 백성들은 돈을 받고 딸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기도 했다. '야노시'라는 작은 몸집의 남자가 처녀들을 모아오는 역할을 했고, '일로너'와 '도르커'라는 두 여인이 에르제베트의 고문을 도왔다. 이들은 처녀들을 성 안 지하실로 데려가 에르제베트가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 에르제베트가 직접 핀으로 찌르거나 칼로 베기도 했으며, 일로너와 도르커는 흐르는 피를 모아 에르제베트에게 마시게 했다고 전해진다. 수십 명의 처녀들을 모아 연회를 열고, 연회가 끝나면 모두 알몸으로 벗겨 차례로 죽인 뒤 그 피를 통에 모아 목욕하며 아직 죽지 않은 처녀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흥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8]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직접 팔이나 가슴, 목을 물어뜯어 피를 마시고 살점을 먹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고문 방법으로는 몽둥이, 채찍질, 칼, 바늘 등으로 피부를 찢거나, 성기나 손가락을 자르는 행위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중에는 귀족 처녀의 피가 더 효과가 좋다는 말을 듣고, 귀족 여학교를 세워 그곳의 여학생들을 희생자로 삼기도 했다.[49]

에르제베트가 살해한 여성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녀의 일기에는 1600년부터 1610년까지 612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총 희생자 수는 1,568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살해 방법 또한 해마다 새롭게 고안되었는데, 체포 후 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고문 기구들이 발견되었다. 알몸의 여자를 쇠꼬챙이와 칼날이 달린 새장 형태의 기구에 넣어 도르래로 들어 올린 뒤 칼날을 조여 피를 쏟게 만드는 기계, '리오넬'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 모양의 관 내부에 쇠못을 박아 알몸의 여자를 넣고 뚜껑을 닫아 피를 짜내는 기계(이는 철의 처녀와 유사하다), 복잡한 톱니바퀴로 몸의 피를 짜내는 기계 등이 있었다고 한다.[48]

현지의 루터교 목사가 에르제베트의 행각을 의심하여 당국에 알렸으나, 바토리 가문의 영향력 때문에 제대로 된 수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피해가 귀족의 딸에게까지 미치자 헝가리 왕가(합스부르크 가문)에도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610년 감금되었던 소녀 한 명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당국에 신고하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1610년 12월 30일, 성에 들어간 조사팀은 다수의 시체와 쇠약해진 소수의 생존자를 발견했다. 또한 성 주변 곳곳에 매장된 여성 시신 50여 구와 온갖 고문 도구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잔혹 행위로 인해 에르제베트는 18세기 러시아 제국의 귀족 다리야 살티코바와 비교되기도 한다.

4. 2. 수사 및 체포

현지에 거주하는 루터교 목사가 에르제베트의 기이한 행각에 대한 소문을 당국에 알렸으나, 바토리 가문의 명예를 고려하여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피해가 신분이 낮은 농민의 딸뿐만 아니라 하급 귀족의 영애에게까지 미치면서, 이 사건은 헝가리 왕국(합스부르크 가문) 궁정에까지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1610년, 감금되었던 소녀 한 명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당국에 신고하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1610년 12월 30일, 체이테 성 안에 들어간 관리들은 성 안에서 잔혹 행위가 가해진 다수의 시체와 쇠약해진 소수의 생존자를 발견했다.

더불어 성 안에서는 온갖 종류의 고문 도구가 발견되었고, 성 곳곳에 많은 시체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4. 3. 재판 및 처벌

1611년 1월, 헝가리의 비체에서 에르제베트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하지만 에르제베트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의 일족이 제출한 탄원서가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48] 재판은 에르제베트의 사촌이자 헝가리 부왕이었던 투르조 죄르지 백작[46]이 지휘했다.

재판을 지휘한 투르조 죄르지 백작


재판에서는 살아남은 피해자들과 피해자 가족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또한 사건에 연루된 시녀와 하인들은 고문을 받은 끝에 수많은 잔혹 행위를 인정했다.[48] 증언에 따르면 에르제베트의 범죄는 매우 잔혹했으며, 피해자 수는 재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80명에서 에르제베트 본인의 기록에 따른 650명까지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재판 결과, 공범으로 지목된 종복들은 참수형에 처해졌고, 두 명의 여종은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주모자인 에르제베트 본인은 고귀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하고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았다.[48]

에르제베트는 체이테 성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 유폐되었다. 성의 문과 창문은 회반죽으로 막혔으며, 오직 음식을 전달하기 위한 작은 창문 하나만 남겨졌다. 옥상에는 그녀가 사형에 처해져야 할 중죄인임을 알리기 위해 교수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에르제베트는 빛 한 점 없는 침실에 갇혀 3년 반 동안 생존했다.

1614년 8월 21일, 감시병이 음식 전달용 창문을 통해 그녀가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 그녀의 영지는 자녀들이 상속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4. 4. 희생자 수

에르제베트가 살해한 여성의 수는 1,568명이 넘는다는 기록이 있다.[48] 그녀의 일기에는 1600년부터 1610년까지 10년 동안에만 612명의 여성을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8]

5. 진실 공방과 정치적 음모론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둘러싼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녀가 저지른 잔혹한 범죄 행위에 대한 기록과 증언이 존재하는 한편, 당시 헝가리 왕국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녀가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제기된다. 이러한 논란은 하위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5. 1. 진실 공방

라스즐로 나기(László Nagy)와 이르마 사데츠키-카르도스(Irma Szádeczky-Kardoss) 등 일부 저자들은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음모의 희생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23][32] 나기는 에르제베트에 대한 소송이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이는 남편 사후 막대한 재산과 헝가리 내 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된 점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개신교 확산, 합스부르크 세력의 헝가리 내 영향력 확대 등 복잡한 종교적, 정치적 상황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33] 특히 당시 국왕 마티아스는 에르제베트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그녀가 체포된 후 이 빚은 탕감되었다.[2]

그러나 이러한 음모론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에르제베트의 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는 루터교 목사 이슈트반 머저리(István Magyari)의 고발로 시작되었다.[16] 이는 가톨릭/합스부르크 세력이 개신교 신자인 에르제베트를 음해했다는 주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다만 에르제베트는 루터교가 아닌 칼뱅주의자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 갈등이 잠재적 원인이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34]

또한, 투르조(Thurzó)가 성에 진입했을 때 다수의 시신과 죽어가는 소녀들을 발견했다는 기록(파린의 저서 등)도 있다.[6] 이에 대해 사데츠키-카르도스는 발견된 물리적 증거가 과장되었으며, 투르조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병사(病死)했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에르제베트의 희생자로 몰아갔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23] 초기에는 지방 루터교 목사의 고발 이후에도 바토리 가문의 명예를 고려해 조사가 은밀히 진행되었으나, 피해가 귀족의 딸들에게까지 미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소문이 퍼졌고, 결국 1610년 공식적인 수사로 이어졌다. 수사관들은 성에서 시신들과 쇠약해진 생존자들을 발견했다고 보고했으며, 성 곳곳에 많은 시체가 매장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이후 밝혀졌다. 이러한 발견이 실제 범죄의 증거인지, 아니면 정치적 음모의 일환으로 조작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5. 2. 정치적 음모론



라스즐로 나기(László Nagy)와 이르마 사데츠키-카르도스(Irma Szádeczky-Kardoss) 등 일부 저자들은 에르제베트 바토리가 음모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한다.[23][32] 나기는 에르제베트에 대한 조사가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특히 남편 사후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상속받은 것이 주요 원인일 수 있다고 보았다.[33] 이러한 주장은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개신교 확산, 합스부르크의 헝가리 지배력 강화 등 복잡했던 헝가리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과 연결된다.[33] 또한, 마티아스 2세 국왕이 에르제베트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으나, 그녀가 체포된 후 이 빚이 탕감되었다는 점도 음모론의 근거로 제시된다.[2]

다른 한편에서는 음모론에 대한 반론도 있다. 에르제베트의 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는 루터교 목사 이슈트반 머저리(István Magyari)의 고발로 시작되었는데,[16] 이는 가톨릭/합스부르크 세력이 개신교도인 에르제베트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주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다만 에르제베트가 루터교가 아닌 칼뱅주의 신자였으므로, 종교적 갈등이 여전히 잠재적 원인이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34] 또한, 파린(Farin)의 저서에 따르면 투르조(Thurzó)가 성에 진입했을 때 다수의 시신과 죽어가는 소녀들을 발견했다고 한다.[6] 그러나 사데츠키-카르도스는 이러한 물리적 증거가 과장되었으며, 투르조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환자들을 에르제베트의 희생자로 왜곡했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23]

일부 자료에 따르면, 에르제베트는 1609년 벤데 라슬로(Bende László)라는 귀족과 재혼하려 했으나, 유산 분배를 우려한 친척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때부터 그녀에 대한 비방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사촌이자 트란실바니아 공이었던 바토리 가보르는 그를 실각시키려는 합스부르크 궁정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에르제베트가 체포된 시점은 가보르가 합스부르크에 대항하는 전쟁 준비를 하던 때와 일치한다. 이 때문에 에르제베트가 반 합스부르크, 친 트란실바니아 성향 때문에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는 추측도 제기된다.

에르제베트의 가문과 후손들은 그녀의 체포가 마티아스 2세가 남편에게 진 빚을 탕감하고 유력 가문인 바토리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가해자들의 증언 중 일부는 고문을 통해 얻어졌으며, 에르제베트 본인은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체포와 심문 과정에는 바토리 가문의 인물들도 참여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수사가 정치적 의도에 따라 진행되고 증언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사건 자체가 완전히 날조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는 드물다.

비슷한 시기에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분가인 일리샤지 이슈트반(István Illésházy) 백작 역시 조작된 혐의로 영지를 몰수당했는데, 이는 합스부르크 궁정에 거액을 빌려준 상인 라자루스 헨켈(Lazarus Henckel)에게 빚을 갚기 위한 조치였다는 의혹이 있다. 이를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가 바토리 가문뿐 아니라 나다스디 가문, 그리고 에르제베트의 딸이 시집간 즈린스키 가문까지 엮어 거대한 스캔들로 만들려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즈린스키 가문과 나다스디 가문은 이후 합스부르크에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당주들이 처형되기도 했다.

16세기와 17세기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며 종종 합스부르크의 지배력 강화에 맞서 단결했는데, 바토리 가문은 그 중심에 있었다. 에르제베트의 백부 스테판 바토리는 폴란드 왕위에 오르기도 했으며, 보츠카이 이슈트반은 반란을 일으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독립을 인정받기도 했다.

17세기 중반에는 에르제베트의 딸 안나의 조카이자 대 오스만 전쟁의 영웅이었던 니콜라 즈린스키(Nikola Zrinski)가 주모자가 되어 헝가리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베세레니 음모가 일어난다. 그러나 니콜라는 사냥 중의 사고로 사망하고, 니콜라의 동생 페타르 즈린스키(Petar Zrinski)가 뒤를 이었지만, 후에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만다. 그 페타르의 딸이 여걸 즈리니 일로나(Ilona Zrínyi)이다. 일로나는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와 바토리 조피아(Zsófia Báthory)의 아들 라코치 페렌츠 1세의 아내가 되었고, 후에 17세기 후반의 반 합스부르크 봉기의 지도자 테켈리 임레(Imre Thököly)와 재혼한다. 게다가 일로나와 피렌츠 1세의 아들이, 18세기 초의 반란군의 장이 된 영웅 라코치 페렌츠 2세이다.

합스부르크가에서 보면 라코치 가문은 반역자의 가문이기도 하며, 에르제베트 사건의 배경에는 합스부르크가와 마자르 귀족층의 오랜 갈등과 정치적 술수가 얽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6. 대중문화 속의 바토리 에르제베트

에르제베트가 동성애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증언도 있었으며[35],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피의 목욕탕’이나 ‘철의 처녀’, 흡혈귀 전설로까지 이어졌다고 추정된다. 어느 날 실수를 한 시녀를 매질하다 시녀에게서 피가 흘렀는데, 그 피가 에르제베트의 손등에 묻자 피를 닦아낸 후의 피부가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고 한다. 이 일 이후 젊은 처녀의 피를 요구하며 시녀를 시작으로 인근 영민의 딸들을 납치하여 생피를 짜내고, 혈액이 식기 전에 욕조에 채워 목욕하는 잔혹 행위를 반복했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고문 기구 "철의 처녀"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피가 흐르는 것을 좋아하고, 피해자의 피부를 물어뜯어 살점을 먹는 행위, 음란함, 흑마술, 악마 숭배 등의 증언은 그녀에게 흡혈귀 이미지를 덧씌웠다.

엘리자베스 바토리의 사건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수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가장 흔한 모티브는 아름다움이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 희생자의 피로 목욕하는 백작부인의 이야기였다. 이 전설은 1729년 예수회 학자 László Turóczi|라슬로 투로치hu의 ''Tragica Historia''에 처음 인쇄되었으며, 이는 바토리 사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었다.[35] 그러나 1817년에 처음 출판된 사건 관련 증언들에는 피 목욕에 대한 언급이 없어[36] 이 이야기의 진위는 의심받게 되었다. John Paget|존 파제트영어는 1850년 저서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에서 바토리의 피 목욕 기원을 설명하지만, 이는 지역 구전 설화를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37] 실제로는 가학적인 쾌락이 범죄의 더 설득력 있는 동기로 여겨진다.[38]

바토리는 ''기네스 세계 기록''에 가장 많은 여성을 살해한 인물로 기록되었으나, 희생자 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39] 조지프 셰리던 레 파뉴의 여성 흡혈귀 소설 『카밀라』(1872년)가 바토리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역시 그녀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영화
  • ''드라큘라 백작 부인''(Countess Dracula, 1971): 피터 사스디 감독. 잉그리드 피트, 나이젤 그린 출연.
  • ''레 레브르 루즈''(Les Lèvres Rouges, 1971): 해리 퀴멜 감독의 벨기에 에로틱 흡혈귀 스릴러. 델핀 세리그 출연.
  • ''부도덕한 이야기(Contes immoraux, 1973): 옴니버스 영화. 세 번째 이야기가 '에르제베트 바토리'. 팔로마 피카소 출연. 발레리안 보로브칙 감독.
  • 크르바바 파니(Krvavá pani, 1980): 빅토르 쿠발 감독의 체코슬로바키아 애니메이션 영화.
  • ''이터널(Eternal, 2004): 캐나다 스릴러 영화. 실제로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인 엘리자베스 케인에 관한 이야기.
  • ''스테이 얼라이브''(Stay Alive, 2006): 윌리엄 브렌트 벨 감독.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주요 악당으로 등장.
  • ''바토리(Bathory, 2008): 유라이 야쿠비스코 감독의 역사 드라마. 안나 프리엘 출연.
  • ''백작 부인(The Countess, 2009): 줄리 델피 감독 및 주연의 역사 드라마.
  • ''프라이트 나이트 2: 새로운 피(Fright Night 2: New Blood, 2013): 미국 영화. 뱀파이어가 된 현대의 바토리 백작부인 역은 제이미 머레이.
  • 음악
  • 베놈(Venom): "Countess Bathory" (1982년 앨범 ''Black Metal'' 수록)
  • 바토리(Bathory): 스웨덴 메탈 밴드 (1983년–2004년).
  • 토르멘터(Tormentor): "Elizabeth Bathory" (1989년).
  • X: "Rose of Pain" (1989년 앨범 ''Blue Blood'' 수록).
  • 크래들 오브 필스: ''Cruelty and the Beast'' (1998년 컨셉 앨범).[47]
  • 카멜롯: "Elizabeth I: Mirror Mirror", "Elizabeth II: Requiem for the Innocent", "Elizabeth III: Fall From Grace" (2001년 앨범 ''Karma'' 수록).
  • 선 오)))(Sunn O))): "Báthory Erzsébet" (2005년 앨범 ''Black One'' 수록).
  • 슬레이어: "Beauty Through Order" (2009년 앨범 ''World Painted Blood'' 수록).
  • 고스트(Ghost): "Elizabeth" (2010년 앨범 ''Opus Eponymous'' 수록).
  • 레가도 데 우나 트라게디아(Legado de una Tragedia): "Círculo VII: Sangriento Elixir" (2014년).
  • じょるじん|조루진일본어: "철의 처녀와 몽상가 공주"(鉄の処女と夢見がちなお姫さま) (2020년, 카가미네 린 피처링 VOCALOID 곡).
  • 문학
  • András Fáy|언드라시 퍼이hu: 『두 명의 바토리 에르제베트』(A két Báthori Erzsébet, 1827년).
  • Supka Géza|게저 슈프커hu: 『저주받은 여자』(Az átkozott asszony, 1941년).
  • 엔도 슈사쿠: 『요녀처럼』 (1987년). 등장인물 오코치 요코가 엘리자베트 바토리의 환생으로 묘사됨.
  • 오노 후유미: 『악령 시리즈』 - "악령이 되고 싶지 않아!" 편에서 블라드 체페슈와 함께 사건의 열쇠가 되는 인물로 등장.
  • 만화 및 애니메이션
  • ''뱀파이어 헌터 D''(Vampire Hunter D: Bloodlust): 1999년 미국 선행 공개, 2001년 일본 공개된 애니메이션 영화. 잔혹한 여귀족 흡혈귀 카밀라가 등장하며, 거성 이름이 체이테 성으로 바토리와 연결됨.
  • 이케다 리요코: 『베르사이유의 장미』 외전 "흑의 백작 부인"에서 엘리자베트 몽테크레르 백작 부인으로 등장.
  • 사에키 카요노, 신타니 카오루: 『쿠오 바디스』에서 현대까지 살아남은 흡혈귀 "바토리 부인"으로 등장.
  • 오오니시 코우이치: 『선혈의 귀부인』 (『댄스 마카브르~서양 암흑 소사~』 1권 수록).
  • 오기노 마코토: 『공작왕 퇴마성전』에서 블라드 체페슈, 질 드 레와 함께 3대 흡혈귀 왕 중 하나로 등장.
  • 코코나시: 『보류장의 녀석들』에서 "엘자"라는 이름의 살인귀로 등장.
  • 카와모토 호무라, 시오즈카 마코토: 『마녀 대전 32인의 이재의 마녀는 서로 죽인다』에서 '농락'의 욕망을 가진 마녀로 등장하여 토모에 고젠과 대결.
  • ''악마성 드라큘라 - 캐슬바니아: 녹턴'':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뱀파이어 여왕으로 등장.
  • 게임
  • 아이★츄: 게임 내 악곡 "배신의 과실"이 에르제베트를 모티브로 함.
  • 몬스터 스트라이크: 게임 내 '바토리'라는 이름의 몬스터 등장.
  • ''뱀파이어 킬러'' (악마성 드라큘라 시리즈 관련작): "엘리자베트 바토리"로 등장. 사라예보 사건을 조종해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드라큘라 부활을 꾀하는 설정. 드라큘라의 조카이며 중간 보스.
  • ''Fate/EXTRA CCC'': "엘리자베트 바토리"로 등장. 용 관련 가문 문장 영향으로 용의 뿔과 꼬리 특징을 가짐. 14세 모습으로 등장.
  • ''페이트/그랜드 오더'':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 ''Fate/EXTRA CCC''와 동일 인물이지만 다양한 바리에이션 존재. 카밀라 역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하며, 후대의 바토리 에르제베트라는 설정.
  • 기타
  • 블러드 레전드: 2018년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 할로윈 이벤트에서 상영된 4D 어트랙션. 바토리의 후손 흡혈귀 이야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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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Elizabeth Bathory | Biography & Facts https://www.britanni[...]
[3] 웹사이트 Lady of Blood: Countess Bathory http://www.crimelibr[...] Turner Entertainment Networks Inc. 201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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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Heroine des Grauens: Wirken und Leben der Elisabeth Báthory: in Briefen, Zeugenaussagen und Phantasiespie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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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Dracula Was a Woman: In Search of the Blood Countess of Transylvania McGraw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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